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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1592와 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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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작 드라마 임진왜란 1592가 안방 극장을 강타했다.

임금이 서울을 버리고 도망간 나라에서 바다의 이순신은 "우리는 누구를 위해 싸우는가" "죽지 마라. 너희들이 죽지 않으면, 내가 죽지 않는다. 너희들이 죽지 않으면 너희 가족이 죽지 않는다. 너희가 죽지 않으면 조선이 죽지 않는다. 나에게는 너희가 조선이다."고 외치며 부하들의 사기를 북돋움과 동시에 시청자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우리가 원하는 때에 우리가 원하는 장소에서 싸운다. 그것이 우리의 싸움이다."

난세에 핀 꽃 이순신(1545~1598)은 이정의 네 아들 중 셋째이며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이백록은 조광조 등과 기묘사화때 참화를 당하여 이순신이 태어날 때 쯤 가세는 많이 기울어진 상태였다.

이순신은 문반 집안임에도 불구하고 28세가 되던 1572년 무인 선발 시험인 훈련원 별과에 응시했다가 낙마하여 시험에 떨어지고 4년뒤 1576년 식년 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로 첫 관직에 나섰다.

이후 조산보만호가 되었는데 중앙에서 그에게 국방강화를 위해 군사를 더 보내줄 것을 요청했으나 적은 군사로는 야인들을 막을 수 없다는 이유로 응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조정의 문책을 받고 삭직되어 백의종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뒤 전라도 관찰사 이광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 선전관 등을 거쳐 1589년 정읍현감이 되었고 유성룡의 추천으로 고사리 첨사로 승진했다.

그리고 1591 47세 되던 해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전라좌수사가 된 이순신은 곧 전선을 제조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등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다음 해인 1592 4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경상좌수사 박홍, 우수사 원균이 재해권을 내준 이틀 후에야 경상우수사 원균으로부터 전란 소식을 듣게 된다.

첫 해전.

5 4일 새벽 85척의 선단을 이끌고 한산도에서 원균의 전선 3척과 협선 2척과 연합하여 옥포해전을 벌인다.

첫 날 26척의 왜선을 격파하고 다음 날 다시 13척을 궤멸시켰다.

이후 사천해전에서는 거북선을 출진시켜 왜군을 전멸시켰다. 이 싸움에서 어깨에 총상을 입기도 했다.

당포와 당항포에서도 왜선 각 20여척, 가덕도 부근에서는 60여척을 무찔렀다.

그리고 왜군의 본거지인 부산포 공략을 위해 전라도좌우수사 연합 선단 170여 척을 동원하여 9 1일 부산포에 정박중인 왜선 500여 척 에 급습하여 100여 척을 격파하여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1593년에는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한산도에 본영을 설치하고 명나라 수군과 연합하여 왜군을 무찌르기도 했다.

1954년부터 이후 3년 동안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으나 왜군의 재침에 대비하였다.

이윽고 1597년 왜군이 다시 침략을 해 오는데 이 무렵 이순신은 원균의 상소와 서인 세력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히는데,

유성룡, 이원익 등이 상소로 이순신의 치죄를 반대하였으나 선조는 이를 묵살하고 이순신을 삭직시켜 백의종군하게 한다.

그리고 삼도수군통제사의 자리는 원균에게 넘어가는데 원균은 전술이 부족하여 수군과 함대를 잃었을 분만 아니라 그 자신도 전사하고 만다.


선조는 하는 수 없이 다시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고.

이순신이 아군을 수습하여 전열을 재정비하였는데 이 때 병력이 고작 120여명에 함대 12척이 남았을 뿐이었다.

이 병력들로 명량에서 왜선 133척을 맞아 싸우는데 아군의 피해는 거의 없이 적선 31척을 파손하는 전과를 올린다.

명량해전으로 다시 제해권을 되찾으니 난민과 수군들이 모여들어 단기간에 세력을 회복하게 된다.

1598 11월 퇴로를 찾아 노량으로 밀려오던 왜군 함대 500척에 맞서 싸워 그들 중 겨우 50여 척만 탈출할 정도로 대승을 거두었지만 적의 흉탄에 맞아 이순신도 전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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